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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e Code 사용기(0): 클로드와 만나기 전, 코딩의 추억 "빨리 깔끔하게!" 작년에 30페이지 정도 논문 형식의 레포트를 쓰는 수업을 들으면서 LLM을 처음으로 제대로 써봤는데, 한 때 '지식노동'이라 불렀던 것들이 사실은 '정보노동'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걸 좀 생생하게 느꼈다. 지식정보노동의 대표격인 '연구'는 이전에 이뤄놓은 성취를 바탕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가미하여 발전시키는 과정이다. 이를 더욱 빨리 처리하기 위해서는 정보수집에 들어가는 시간을 줄이고, 산출물의 완성에 들이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 생각해보면, 엔지니어였던 내게 실제로 엔지니어의 능력을 발휘하는 시간은 '잡일'에 절반 이상 몰두한 후에 남는 시간이었다. 무슨 일을 하든 잡일을 "빨리 깔끔하게" 하는 사람이 일 잘하는 사람인 건 아마 유사이래로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을 것 같다. 일하던.. Technology&Science/AI 2026. 3. 29.
글로벌 테크노 자본주의의 상상력이 보여주는 “어쩔수가없”는 세계: <어쩔수가없다>의 개연성과 모순 우선 영화는 너무 재밌었다. 을 심각한 사회 고발극이 아닌 블랙코미디로 즐겼다면, 를 보면서도 씁쓸한 웃음을 터뜨릴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주인공과 거리설정에 있어 주제의식을 드러내기에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은 있으나, 블랙코미디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는 있다.(만수는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임은 분명한데 관객이 떨어져서 보기 어렵게 화면 구도가 잡혀서 공감 안 된다는 평이 많은 것 같다. 에서 통념에 도전하는 도발적인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화면구성은 효과적이었는데 어쩔 수가 없다에서는 조금 미진한 부분이 있지 않았나 아쉬움이 좀 있다) 이 영화가 표현하는 세계는 ‘글로벌 테크노 자본주의의 상상력이 빚어낸 어쩔 수가 없는 세계’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기 위해선, 이 영화가 구조적.. Movies 2026. 2. 6.
제2차 퀄컴사건에 대한 이해 본 글은 2024. 9. 로스쿨 기업법 학회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발제문을 보강한 것입니다. 제2차 퀄컴 사건에 대한 이해와 시사점(대법원2020두31897)인하대법학전문대학원 15기 조희준I. 서론: 주제 선정이유- 2023.4.13 퀄컴사의 표준필수특허 라이선스를 이용한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행위에 대하여 약 1억 300억원의 공정위 과징금이 대법원에서 확정.- 다국적 기업 간 특허 관련 분쟁이 많이 벌어지는 ICT 산업에서 특허권 남용의 경쟁법적 규율이란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국내 기간산업 기업들에게도 중요한 주제가 될 것.- 표준필수특허를 이용한 시장지배적지위 남용행위에 관한 판단 법리를 이해해보고자 함.II. 표준기술특허와 FRAND 조건[1]1. 표준화- 표준화는 단일 회사의 사실상 표준 정립행.. Law/공정거래법 2026. 1. 28.
김지원,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지금도 책 읽기가 취미인 까닭 “What is your hobby?” 어린 시절 영어 교과서에 만난 이 가벼운 질문은, 한국말로 던져지는 순간 피하고 싶은 질문이 된다.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취미는 흥미로우면서도, ‘잘’해야 하는 취미여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악기, 요리, 헬스 같은 것을 생각해 봐도 취미로 만들기까지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다행히 이 취미들은 잘하는 취미라는 걸 보여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악기는 연주를 들려주면, 요리는 음식을 맛보게 해주면, 헬스는 옷으로 감추고 있어도 눈에는 다 보인다. 책 읽기는 취미일까? 아무래도 면접에서 말할만한 취미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직장을 구하는 면접이든, 아니면 소개팅이라는 애인을 구하는 면접에서든, 어쩌면 흥미로운 정보를 얻는데, 보다 재미있고 노력도 덜 드는 .. Readings 2025. 7. 15.
박준영, 『반도체를 사랑한 남자』: 기술과 노동 유연화에 대한 다른 상상 반도체를 사랑한 남자이 책은 문화인류학자의 시선으로 엮은 삼성전자 반도체의 혁신·성장의 과정이자 그 현장에서 땀 흘렸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삼성전자 반도체는 반도체 불모지이자 국민소득 2천 달러 수준이던 1980년대 초 ‘경영진의 결단’으로 선진국에서나 가능하다는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삼성은 세계 일류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본격적인 사업 시작 10여 년 만에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를 달성했다. 그 과정에 1988년 삼성반도체통신에 입사해 2023저자박준영출판북루덴스출판일2023.09.05 『반도체를 사랑한 남자』는 내가 잠시 몸담았던 산업군의 옛날 이야기고 현재의 이야기 때문에 중간중간 킥킥대면서, 때로는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쓰럽다는 생각도 하면서 읽었다. 저자는.. Readings 2025. 4. 5.
박형서, 『낭만주의』: 투명하게 표현되는 SF 소설 낭만주의현실보다 정교한 설정, 우주만큼 무한한 상상력 소설 실험가 박형서가 생에 바치는 기발하고 애잔한 세레나데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날렵한 유머 감각으로 삶의 비극을 흥미롭게 이야기하는 ‘농담의 악마’ 박형서의 다섯번째 소설집 『낭만주의』가 출간되었다. 소설쓰기라는 행위에 어떤 한계도 설정하기를 거부하면서 ‘비슷한 가짜’가 아닌 ‘진짜’ 소설을 쓰기 위해 실험을 거듭해온 작가는 2014년 여름부터 2017년 봄 사이에 발표한 이 6편의 중단편으로 자신 저자박형서출판문학동네출판일2018.07.11   문학은 잘 모르는 분야라 박형서의 단편소설을 모은 『낭만주의』는 비평을 먼저 읽고 나서 폈다. SF의 계보를 추적하면, SF는 과학적 요소가 ‘인지적 낯설게하기’를 수단으로 쓰이는 SF와 과학적 ‘인지의 확장.. Readings 2025. 3. 1.
김영란, 『판결 너머 자유』: 우리 사회는 분열사회에서 공존사회로 이행하고 있는가 판결 너머 자유  롤스가 꿈꾸던 다원주의의 토대: 중첩적 합의와 기본적 자유들  극단적인 대결 사회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우리는 정의로운 다원주의 사회로 어떻게 이행할 수 있는가? 김영란 전 대법관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롤스의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를 가져온다. 『정의론』은 선험적(transcendental)이면서도 이성적인 사회계약의 내용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다. 그가 ‘무지의 베일’에서 합의될 수 정의의 내용의 원칙은 위계 없는 기본적 자유(들)의 체계를 모두가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것,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의 원칙이 되는 공정하고 균등한 기회균등과 최소 수혜자의 최대 이익이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어떻게 사회계약을 존속시키면서도 안정적인 다원주의 사회를 구축할 수 있는가의.. Readings 2025. 1. 4.
<나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 여전히 좋은 어른으로 남을 수 있길 보편적으로 좋은 영화라고 호평 받는 영화는 아닐지라도, 그냥 편안하고 익숙함에 보는 나만의 단골 ‘영화’가 있다. 를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도 비슷한데, 인터넷에 평이 많지 않아 객관적인 평가는 몰라도, 시청각 예술이라는 영화적 양식과 서사의 합일이라는 관점에서 영화적 성취가 눈에 띄게 보이진 않는다. 물론 , 와 같은 영화들은 예외적으로 양식과 서사의 합일을 일정부분 성취해냈지만,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대해서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가치는 디테일에 있다고 생각한다. 통속극 중에 통속극인 장르 특성상 그 양식과 기본적인 서사가 정형화되어 있기에, 영화 평가기준은 시대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도 정서적으로 공감 가능한 인물에 둬야 한다. 막 개봉한 로.. Movies 2024. 9. 2.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불가해한 재앙을 대하는 자세 근대성은 자기 자신을 준거로 삼는 합리성이다. 근대인은 도덕적 정당화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 근거를 찾으며, 따라서 자신의 행동에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러한 논리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근대과학은 초자연적인 힘에 기대어 세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우연히 일어난 일은 없고 분명 이 계(system) 안에 필연이 존재한다. 과학이 발견한 변수들과 함수로부터 우리는 계에 관한 새로운 예측모델을 만들고, 그에 기초해서 미래를 대비한다. 그리고 그 대상이 복잡한 시스템일 때 우리는 아주 자주 변수를 놓친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벌어지고, 일어날 일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 근대인의 숙명은 언제나 무너진 인과적 설명의 모래성을 다시 쌓는 일이다.근대, 재앙, 통치 코엔 형제의 는.. Movies 2024. 7. 28.
<블링 링>: 너무나 당혹스러운 뻔뻔함 때로는 상업적으로도 실패하고, 영화 그 자체의 재미로서도 실패하는데도 의미가 있는 영화가 있다. 오래 전에 봤던 도 사실 꽤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다른 영화 리뷰를 쓰다 짧게 남긴다. 2015년 겨울이었을까? 병역 복무 중이던 친구와 휴가를 맞춰서 나와 유명 예술 평론가인 교수님과 함께하는 영화 감상회에서 을 본 적이 있다. 소피아 코폴라가 감독하고 엠마 왓슨이 출연하는 영화로, 미국 청소년들이 할리우드 스타 집에서 ‘장난 삼아’ 각종 명품을 훔치고 SNS에 자랑하고 결국은 잡혀서 처벌받는 후일담을 담았다. 줄거리만 들어도 할리우드의 하이틴 영화적 상상력의 빈약함이 느껴지고, 왜 선생님이 이 영화를 보자고 하신 걸까 고민도 들 정도였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실화다. 실화여서 문제작이다. 그 어떤 도덕적 .. Movies 2024. 7. 28.
에로스의 재건을 위하여 - 정강산(2024), 「자본주의 구조위기의 리비도 형세: ‘암울한 세대’ 너머의 감정사를 향하여」 고백하건대, 나는 정신분석학에 관한 개념을 잘 모른다. 제대로 된 입문서 한 권 읽은 적은 한 번도 없거니와, 사회구조의 심층에 대한 분석에 정신분석학적 개념은 자리할 곳은 없고, 크게 의미있는 분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반면, 현상으로서 사회를 뒤덮는 감정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평균’ 내지는 ‘전체로서 사회’의 감정구조를 진단하는 것은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 문화분석의 영역에서 정신분석학이 빛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문화/과학에 실린 정강산의 「자본주의구조위기의 리비도 형세: ‘암울한 세대’ 너머의 감정사를 향하여」는, 그런 의미에서 ‘청년’으로 호명되는 집단이 드러내는 징후들에 대한 가장 탁월한 분석이며 동시에 현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위기가 이토록.. Readings 2024. 7. 3.
<킬링 디어>: 복수극의 이면, 사적 제재의 잔혹성 복수극에서 느끼는 쾌감 뒤의 사법제도 불신복수극의 묘미는 통쾌함에 있을지도 모른다. 억울하게 피해를 입었지만, 사법제도는 피해자 혹은 그 가족들의 억울함을 구제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해자가 법의 비호를 받고 피해자는 비참해진다. 결국 피해자는 그 응징을 법 대신 직접 해낸다. 이에 대한 가해자의 뉘우침이나 공포 또는 후회는 주로 인과응보를 피하려는 발악으로만 묘사된다. 그러나 좋은 말로 해야 복수극이지, 근대적 의미에서는 엄밀히 말해 사적 제재다.사법권력이 지배의 일축을 맡는 근대 사회에서 폭력은 국가가 독점한다. 국가가 행하는 폭력도 적법하지 않으면 위법하고, 사인의 폭력은 당연 불법이다. 그럼에도 사적 제재의 복수극에서 오는 쾌감은 아마 법 감정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법제도의 무능에서 오는 쾌감이다... Movies 2024.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