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ovies

<킬링 디어>: 복수극의 이면, 사적 제재의 잔혹성

by 양자역학이 좋아 2024. 6. 30.

복수극에서 느끼는 쾌감 뒤의 사법제도 불신

복수극의 묘미는 통쾌함에 있을지도 모른다. 억울하게 피해를 입었지만, 사법제도는 피해자 혹은 그 가족들의 억울함을 구제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해자가 법의 비호를 받고 피해자는 비참해진다. 결국 피해자는 그 응징을 법 대신 직접 해낸다. 이에 대한 가해자의 뉘우침이나 공포 또는 후회는 주로 인과응보를 피하려는 발악으로만 묘사된다. 그러나 좋은 말로 해야 복수극이지, 근대적 의미에서는 엄밀히 말해 사적 제재다.

사법권력이 지배의 일축을 맡는 근대 사회에서 폭력은 국가가 독점한다. 국가가 행하는 폭력도 적법하지 않으면 위법하고, 사인의 폭력은 당연 불법이다. 그럼에도 사적 제재의 복수극에서 오는 쾌감은 아마 법 감정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법제도의 무능에서 오는 쾌감이다. 물론, 대중적 법 감정과 사법제도의 논리의 괴리가 대중의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나, 이는 사법부가 짊어져야 할 숙명이며 원죄다.

신화적 모티프의 근대적 각색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는 희생양 모티프의 근대적 각색이며, 복수자의 관점이 아닌 그 이면의 사적 제재에 두려워하는 가해자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여타 다른 복수극과는 다른 감각을 선사한다. 아가멤논과 신성한 사슴 모티프는, 트로이 출정을 앞둔 그리스 연합군의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가 아끼는 사슴을 쏴 죽이는 바람에, 배가 출항하지 못하고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자신의 딸을 희생양으로 바친다는 내용이다. , 사슴을 쏴 죽인 대가로 신은 등가물을 요구한다. 인과응보의 사상에 따라 아가멤논은 그 자신이 아닌 그가 아끼는 것을 바쳐야 했다.

신화는 일상적이다. 욕망이든, 감정이든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주인공 스티븐은 심장 전문의로, 오래 전 음주 후 마틴의 아버지 수술을 집도했고 그의 죽음으로 이끈다. 스티븐은 그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마틴에게 호의를 베풀고 그의 가족들을 소개해주기까지 하나, 마틴의 복수에 대한 욕망은 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틴은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대가로 스티븐의 처, , 막내 아들 중 한 명을 스티븐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는다면 모두 죽을 것이라고 저주한다. 그것이 공평하다면서.

 

근대사회에서 신화의 생명력은 근대적 맥락으로 변용되어 나타난다. 함무라비 법전은 인과응보를 담고 있었지만, 근대형법은 응보적 정의가 아닌 범죄예방 및 회복적 정의의 구현을 목적으로 한다. 의학은 중세 대학 3 학문 중 하나로 근대성의 상징이며, 의사과실의 은폐된 의료사고는 자기책임주의에 입각해 행위자 자신의 업무상 과실치사로 의율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 마틴의 아버지 사망에 대해 스티븐은 법적 책임을 지지 않게 되었고, 마틴은 그 상실에 대해 스티븐이 책임을 다하길 바랐다. 처음엔 그의 어머니로 하여금 스티븐을 유혹하여 그의 아버지의 빈 자리를 (혹은 어머니의 남편의 빈자리) 채우고자 하였고, 스티븐의 거부로 피해의 수복과 자기책임을 넘어선 본격적인 복수극이 시작된다.

막내 아들과 딸은 갑작스레 걷지 못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도 마틴의 지시에 따라서는 또 걸었다. 스티븐은 뭐라도 하기 위해 마틴을 묶어두고 폭력을 행사하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부는 둘 중 하나는 죽이고 더 낳자는 결론에 다다르기도 하고, 아내는 마틴에게 무릎을 꿇고 빌기까지 한다. 결국 스티븐은 아내, , 아들을 묶어두고 복면을 씌우고, 자기 자신도 복면을 쓰고 빙글빙글 돌면서 총을 쏜다.

사적 제재, 응보적 정의의 폭력성

몇몇 리뷰들이 <더 랍스터>와 비교하며 말하듯,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 중 하나는 가족의 절대성에 대한 부정이라는 의견도 일견 타당하나, 나는 <킬링 디어>에서 근대사회에서 금지되나 개인들이 욕망하는 응보적 정의의 디스토피아가 좀 더 큰 주제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가족의 절대성을 지키고자 했으나 깨지는 것은 종국에 가서였고 이는 고통의 장치였다.

아이들에게 첨단의 의학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하체 마비가 왔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부부는 고뇌한다. 무엇을 해도 스티븐의 죄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았고, 결국 마틴이 갈구했던 응보적 정의의 실현을 통해서, 고통을 통해서 저주가 풀렸다. 마틴에게 중요했었는지도 알 수 없는 그의 아버지를 죽였던 죄는, 스티븐이 그의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임으로써 씻어진다. 스티븐의 가족이 저주에 걸린 후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들의 고통을 보는 것은 힘든 일이었고, 또 그 이후도 아마 행복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복수극에서 응보적 정의의 실현이 주는 카타르시스와는 반대로, <킬링 디어>는 그 반대편 복수의 상대방에게 가해지는 잔혹함을 보여준다. 자기책임주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이 영화는 기괴하기보다는 유익하다. <더 랍스터>에서의 표정 없는 커플들 혹은 솔로들의 무미건조함이 주는 부조리와 마찬가지로 <킬링 디어>에서 마틴의 무표정은 그 부조리를 의미한다.

스티븐 가족의 불행을 지켜보기 힘든 것은 <더 랍스터>에서 느껴지는 간절함에서 느껴지는 숭고함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 랍스터>에서는 적어도 무능한 체제와 더 무능한 조직된 반체제 투쟁의 폭력에 저항하는, 간절한 주체의 선택이 주는 숭고함이 있었다. 그러나 <킬링 디어>에서의 사적 제재에 스티븐은 무엇을 해도 벗어날 수 없었고 무력함에 내린 선택은 숭고함은커녕,비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학교에 대법원장님께서 후보자 지명 후 바로 다음 날, 강연을 오신 적이 있었다. 강연에서는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은 커지는 와중에 사법부의 판단을 구하는 사건은 많아지고, 또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법처리에도 불구하고 재판 지연에 대해 불만이 많은 현상에 대해 사법부가 신뢰를 되찾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다. 사회적 관점에서 이에 대한 분석과 극복방안을 모색하는 강연이 끝나고 질문으로 법조인으로서 할 수 있는 방안을 여쭤보는 질문에 국민들이 신뢰할 수 있도록 신속하고 공정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라고 하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전문가의 도덕이란 직업윤리에 충실하되, 대중에게 그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설득하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법 공부를 시작하고 가끔 주변 사람들에게 형사 사건 판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다른 관점들을 이야기해주기도 하지만 법 감정과의 판단과의 괴리는 요원하다. 그렇기에 비극일지라도 <킬링 디어> 같은 영화는 참 세상에 이롭다고 느껴진다.



킬링 디어
"대가를 치러야지?" 성공한 외과 의사 스티븐과 그에게 다가온 소년 마틴 미스터리한 그와 친밀해질수록 스티븐과 그의 아내의 이상적인 삶은 완벽하게 무너지는데... ​ "이 악몽을 끝내줘. 할 수 있어?"
평점
5.6 (2018.07.12 개봉)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출연
콜린 파렐, 니콜 키드먼, 배리 케오간, 래피 캐시디, 서니 설직, 알리시아 실버스톤, 빌 캠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