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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s

<나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 여전히 좋은 어른으로 남을 수 있길

by 양자역학이 좋아 2024. 9. 2.

보편적으로 좋은 영화라고 호평 받는 영화는 아닐지라도, 그냥 편안하고 익숙함에 보는 나만의 단골 ‘영화’가 있다. <나의 특별한 사랑이야기>를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도 비슷한데, 인터넷에 평이 많지 않아 객관적인 평가는 몰라도, 시청각 예술이라는 영화적 양식과 서사의 합일이라는 관점에서 영화적 성취가 눈에 띄게 보이진 않는다. 물론 <라라랜드>, <비포 선라이즈>와 같은 영화들은 예외적으로 양식과 서사의 합일을 일정부분 성취해냈지만,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대해서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가치는 디테일에 있다고 생각한다. 통속극 중에 통속극인 장르 특성상 그 양식과 기본적인 서사가 정형화되어 있기에, 영화 평가기준은 시대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도 정서적으로 공감 가능한 인물에 둬야 한다. 막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이런 척도로 평가하긴 어렵겠지만 5년 이상 흐른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떻게 생모를 어떻게 모르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가 되면 어린 시절과 많이 달라지는 법이고, 초등학생 때 처음 성교육을 받을 때 , 아니 중고등학생 떄 유전 법칙을 배우더라도 이런 일은 종종 있는 법이다.

  <나의 특별한 사랑이야기>의 줄거리는 미드 <How I met your mother>처럼 수수께끼 이야기로 전개된다. 주인공 윌 헤이즈는 아내와 이혼을 앞두고 별거 중인 뉴요커다. 초등학생 딸 마야가 학교에서 성교육을 듣고 온 날,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궁금하다고 졸라대는 마야에게 윌리엄은 대학 졸업 후 뉴욕에 온 이래 자신의 연애사를 이야기를 해준다. 에밀리, 썸머, 에이프럴 셋 중 누가 엄마인지 수수께끼를 내면서 말이다. 
  이미 다 큰 아빠 윌의 성장담, 까마득히 어리지만 아빠에게도 현명한 조언을 건네면서도 어린 아이다운 모습도 가진 딸 마야, 안정적인 삶을 꿈꾸는 첫사랑 에밀리, 강렬하고 영감을 불러일으키지는 썸머, 친구 같으면서도 늘 어긋나는 에이프럴, 그 외 윌의 복잡한 과거사에 등장하는 개성적인 인물들 하나하나 군더더기 없다는 점에서 로맨틱 코미디로 한 번 보기엔 괜찮은 영화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지만 마야의 생모의 성격에 대한 묘사는 지나치게 전형적인데, 아빠가 곧 이혼을 앞둔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딸에게 해준다는 걸 유념한다면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영화 내내 이렇게 비슷한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대조되는 신들이 윌의 감정을 드러낸다. "빌과 그의 약점을 위하여!" 혹은 "IS의 뜻을 모른다니!"

  특출나진 않더라도 이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코가 찡해지는 부녀간의 따뜻함과 윌이란 인물의 디테일에 느끼는 동질감 때문이다. 여기부턴 스포일러를 피할 수 없다. 윌은 순수한 믿음의 붕괴를 경험하는 인물이다. 그의 삶은 늘 꿈과 사랑에 쏟은 헌신에 배신을 당해왔고, 결국 꾸린 가정마저 이제 싸인만 하면 끝나는 상황에 와있다. 그가 처음 뉴욕에 온 건 빌 클린턴의 대선 뉴욕 프라이머리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는 잡일을 도맡아 하면서 불평, 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클린턴의 승리를 위해 헌신했다. 그를 둘러싼 의혹 보도가 나와도 '남들과 다르다’며 클린턴을 강변했다.
 

  선거운동에서 능력을 인정을 받는 가운데, 그의 연애사는 이 때부터 수난이었다. 뉴욕주 프라이머리 시절, 뉴욕에 온 에밀리에게 청혼하는 그는 'Yes’가 아니라 사실 룸메이트와 잤다는 고백을 들어야 했다. 선거 이후 그는 친구와 의기투합해 선거 컨설팅 회사를 차리고 곧 뉴욕 주지사 경선에 나서는 옛 상사인 로브레도의 선거운동을 맡는 큰 기회를 잡는다. 그 당시 뜨거웠던 연인 썸머에게 청혼하기 위해 반지를 사면서 윌은 장밋빛 인생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썸머는 옛 연인 햄튼 교수의 조언에 따라 로브레도의 도덕성 관련 의혹 기사를 낸다. 윌은 선거도 연인도 그리고 프라이머리 시절부터 함께 했던 동지마저도 잃는다.
  윌이 삶에 흥미를 잃어갈 무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클린턴의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지고 탄핵안이 논의되기에 이른다. 그는 이제 삶에 대한 의지 없이 폐인처럼 지낸다. 에이프럴이 깜짝 생일파티를 준비했지만 생일 날까지 그는 무기력증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경선 때 친구들은 여전히 클린턴을 지지하지만, 그의 낙심은 생일축하 노래가 울려퍼질 때 그를 사라지게 만든다.

   딸인 마야가 들어도, 에밀리(본명은 사라- 영화 거의 첫 장면에 이혼서류에 나온다)를 다시 만나기 전 아빠의 삶에 해피앤딩이 있을 리가 없다. 단지 이혼남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를 마치고 딸을 에밀리에게 다시 맡기고 돌아오는 길, 그는 우연히 공원에서 경호원들과 조깅하는 클린턴 전 대통령을 마주친다. “각하, 92년 대선에서 선거운동을 했던 윌 헤이즈입니다!” 윌의 외침에도 대통령은 그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지나간다. 대의와 믿음, 관계 모두 잃어버린 그의 젊은 시절은 이렇게 다 부정 당할 수밖에 없는 걸까?
  윌의 모습은 이제 광고회사에 다니며 CF를 만드는 일상에 찌든 직장인이지만, 그는 여전히 딸에게 따뜻하고 엇나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큰 성공을 거두기는커녕 배신으로 늘 괴로워하지만, 그의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결혼 생활은 비록 실패했을지 몰라도 딸을 잘 키웠고, 다른 성과들도 있다. 짐을 마저 풀다가 에이프럴에게 주려 했던, 그녀가 잃어버리고 찾아 헤맸던 아버지의 유품을 다시 발견하고 그녀가 일하는 엠네스티로 찾아간다. 별 생각 없이 아르바이트로 경선캠프에서 copy girl을 하던 에이프럴. 그녀가 무얼 하고 싶은지 방황하고 헤맬 때 그가 건넸던 따뜻한 말은 수년간 그녀를 여행하고, 공부하게 만들었고 이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멋진 어른으로 성장시켰다.

  20대 초반의 선한 믿음과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찬 소년으로 남진 못했다. 세상은 생각보다 도덕적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기대는 하지 않는다. 주변에 함께 하는 사람들과도 항상 같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가끔은 믿음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배신도 당한다. 그렇지만 함께 했던 시간들과 주고 받은 영향은 영원히 남는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건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젊음은 영원하지 않고 내 삶에도 없었으면 했던 상처와 오명이 하나 둘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좌절하더라도 비뚤어지지 않고 좋은 어른으로 남는 것. 소년시절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누군가를 마주치더라도 ‘아직도’가 아닌 ‘여전히’ 괜찮은 사람으로 남아있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다.
p.s. 제일 좋아하는 장면.

 
 

나의 특별한 사랑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