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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s

가야타마 모리히데, 『미완의 파시즘』(2012): '갖지 못한 나라'의 교의

by 양자역학이 좋아 2026. 4. 21.


1. "천황폐하 만세"의 기원에 대하여

  애투 섬, 1943년 5월. 2,600여명의 일본군 수비대는 압도적인 미군 병력에 맞서 만세 돌격까지 감행한 끝에 거의 전멸한다. 미군 종군기자는 이 장면을 "영원한 생명을 믿는 충성의 화신"이라 기록했다. 같은 해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의 이름으로 간행된 『전진훈』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말라."

  이 광기를 설명하는 가장 손쉬운 방식은 일본 군국주의의 비합리성, 천황 신앙의 광신, 동양적 정신주의의 잔재 같은 어구를 동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저들은 미쳐 있었다"로 요약하는 것. 가타야마 모리히데(片山杜秀)의 《미완의 파시즘》(2012)은 오히려 그것이 가능했던 사상적 기원을 탐구한다. 저자는 '천황폐하 만세'의 광기가 광신자들의 돌발이 아니라, 놀랄 만큼 냉철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옥쇄'[1]는 정신의 파탄이 아니라 '갖지 못한 나라'가 '가진 나라'와 싸우기 위해 짜낸 합리적 교의의 결과였다. 그것이 가장 서늘한 지점이다.

  저자인 가타야마는 게이오대학 법학부 교수로, 정치사상사 연구자면서 보수 우익 논객으로 분류되며, 하시카와 분조에게 사사했다. 그의 스승 하시카와 분조는 계몽과 합리를 앞세운 근대 일본이 어떻게 그 내부에서 도취와 파멸을 향한 충동을 키웠는가를 분석한 사상사가다. 가타야마가 이 책에서 취하는 방법론도 그 계보 위에 있다고 평할 수 있다. 그는 전쟁을 그 자체로 비판하는 것이 아닌, 일본 근대의 내부 논리를 해부하는 입장에서 글을 쓴다. 실제로 그는 다른 책 『국가가 죽는 방법』(2013)에서 메이지 헌법 체제는 처음부터 총력전을 수행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고, 따라서 총력전의 시대에 일본이 "갖지 못한 나라"로 뒤처지는 것은 구조적 필연이었다고 주장한다. 『미완의 파시즘』은 그 필연을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나 어떻게든 해답을 찾으려 했던 네 명의 군인(오바타 도시로·이시와라 간지·나카시바 스에즈미·사카이 코우지)의 시대 인식을 따라간다.

  사카이를 제외한 세 사람, 오타바, 이시와라, 나카시바를 중심으로 가타야마는 이들을 '일본 군국주의의 광신자 계보'로 엮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 사람은 각자 동일한 시대인식에도 불구하고 같은 질문에 다른 방식으로 답했던 세 사람이다. 1차대전 이후, 총력전의 시대에, 공업력과 자원을 갖지 못한 일본은 어떻게 싸울 것인가? 그리고 이들 모두에게는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의 분리, 저자가 '밀교'와 '현교'라 부르는 이중성이 있었다.

 

2. '갖지 못한 나라'라는 조건

  먼저 이 책이 전제로 삼는 일본의 물질적 조건을 짚어야 한다. 1차대전 직전의 일본은 공업 총량 면에서 식민지 인도와 비슷한 수준(정확히 말하자면 1인당 기준으로는 일본이 앞섰으나 총량으로는 비슷했다)으로 다른 열강에 비하면 빈약했다. 중화학공업은 빈약했고, 전쟁특수로 잠시 호황을 누렸으나 그것은 도쿠토미 소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로소득'이었다. 전후공황(1920), 간토대지진(1923), 대공황이 10년 안에 차례로 덮치면서 성장의 환상은 무너졌다.

  저자가 주목하는 첫 장면은 1928년이다. 이 해에 통수강령이 개정되면서 병참(보급) 항목이 삭제된다. "통수에 보급은 필요 없다"는 사상이 제도화된 순간이다. 이 개정이 1944년 임팔 작전의 3만 명 아사로 이어지는 것은 불운이 아닌 필연에 가깝다. 실제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 사망자의 다수는 전투가 아니라 굶주림과 병으로 죽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근대적 보급전에 대한 무지나 비합리성의 차원에서 해석할 결과가 아니다. 저자가 이 책 내내 반복해서 보여주듯, 일본 육군 내부에는 근대전의 실상을 아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다. 1914년 칭다오 전투에서 가미오 미츠오미 사령관은 포병과 공병의 연계로 독일 요새를 함락시키면서 근대적 물량전의 가능성을 실증하기도 했다. 다만, 제도화에 실패한 지식은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 오직 전쟁의 '의의'와 '교훈'만 계승되고 전제들은 전승되지 않을 때, 그 공백은 무엇이 채우는가?

  1928년의 통수강령 개정은 그 공백을 '정신'으로 채우겠다는 결정이었다. 불편한 전제를 제도에서 지우면, 현실이 바뀌는 게 아니라 제도가 현실을 기각한다. 이 결정은 한 사람의 광기가 아니라, '갖지 못한 나라'의 공포에 대한 매우 합리적이고 일관된 응답이었다. 그 공포 위에 세 사람의 사상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쌓인다.

 

3. 오바타 — 아는 자의 침묵 (밀교의 은폐)

  오바타 도시로(小畑敏四郎)는 이 책의 첫 번째 인물이다. 그는 제1차대전 당시 타넨베르크 전투를 실상에 가깝게 알고 있었다. 일본 육군 내부에서 통용되던 타넨베르크 전투는 "독일군 13만이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 50만을 격파했다"는 서사가 과장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실제로 포위된 러시아 제2군은 약 15만 정도였고, 승리의 결정적 요인은 독일군의 무선 도청과 철도 기동, 조직력이었다. 그러나 일본 육군은 이 승리를 "정신력과 결단의 승리"로 독해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이다.

   오바타는 더 나아가, 총력전 체제에서 일본이 '가진 나라'인 미국·소련을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여기가 이 책의 핵심 개념이 등장하는 지점이다. 저자는 오바타의 이중성을 밀교(密教)현교(顕教)로 나눈다. 밀교는 내부자들끼리 공유하는 냉정한 현실 인식, 우리는 총력전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 현교는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그러나 섬멸전 전략으로 강적과도 싸울 수 있다는 교의다. 오바타는 자신이 현교의 전제가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육군대학교에서는 현교를 가르쳤다.

   왜 밀교를 공개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은 간접적이지만 분명하다. '갖지 못한 나라'에서 "우리는 이길 수 없다"는 밀교를 공개한다는 것은 군대 자체의 존재 근거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군대는 '이길 수 있는 전략'을 가르쳐야만 군대일 수 있다. 현실을 아는 자가 그 현실을 공식 교의로 올릴 수 없을 때,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선별된 독자에게만 진실을 말하고, 공식적으로는 허구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이중성이 1936년 2·26 사건까지는 작동했다. 이 사건은 황도파 청년장교들이 원로와 중신들을 습격하고 도쿄 중심부를 나흘간 점거했다 진압된 군내 쿠데타 미수로, 결과적으로 황도파가 완전히 숙청되고 통제파가 군의 주도권을 잡는 분수령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오바타처럼 밀교의 전제를 아는 자들이 군 중심부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남은 것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진 현교뿐이었다.

   오바타가 1946년 반공 투표를 하러 갔다가 걸린 감기가 결핵으로 번져 죽었다는 마지막 장면은 이 책에서 가장 쓸쓸한 대목 중 하나다. 자신이 만든 신화의 귀결을 목격하고 조용히 퇴장하는 사람. 아는 자가 사라진 뒤의 세계에서, 지식은 신앙이 된다.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친 결과, 전쟁 말기의 일본군은 밀교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현교에 투신하게 된다.

 

4. 이시와라 — 신앙을 숫자로 번역한 자

   통제파라 불리는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는 오바타의 정반대 극단에 있다. 오바타가 알면서 침묵한 사람이라면, 이시와라는 신앙을 먼저 가진 뒤 그것을 전략의 언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그의 '세계최종전론'은 동양(일본)과 서양(미국)의 최종 결전이 운명적으로 도래한다는 사상이다. 이 사상의 근거는 전략 분석이 아니라 다나카 지가쿠의 니치렌주의, 즉 법화경 해석이었다. 그런데 이시와라는 이 종교적 비전을 '근대적'으로 재해석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중국 전체를 산업기지로 삼아 일본을 '가진 나라'로 만든 뒤 결전에 임한다는 구상을 제시했고, 경제성장률을 역산해 1966년 혹은 1972년이라는 타임라인까지 설정했다. 1930년대 미국은 공황의 여파로 연 평균 0.2% 성장하고, 일본은 매년 5%에 가깝게 성장했던 기간을 기준으로 계산한 것이다. 신앙을 숫자로 번역한 것이다.

   만주국은 이 구상의 실험장이었다.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의 실제 달성률은 목표의 40% 수준이었다. 참고로 만주국이 참고한 소련의 5개년 계획 역시 실제로는 목표의 50% 수준이었음에도 "4년 3개월 만에 달성"으로 발표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성과는 놀라웠다. 만주국의 계획경제 모델은 이후 한국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뿌리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2]

   이시와라는 관동군 참모로 만주국 건국에도 관여했지만 이후 도조 히데키와 갈등 끝에 1941년 예편당했다. 그는 중국을 '가진 나라'로 만들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채 대미 개전으로 끌려 들어가는 일본을 지켜봐야 했다. 자신이 설계한 구상의 속도에 현실이 따라오지 못했을 때, 신앙은 현실에 항복하지 않는다. 현실을 원망할 뿐이다. 이시와라가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 사카다 임시법정에 증인으로 출정해 "트루먼이야말로 제1급 전범"이라 선언하고 만주사변을 자위행동이라 끝까지 주장한 것은[3], 그가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신앙이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가진 나라가 되는 것'이라는 조건을 세계최종전론의 전제로 설계했으나, 그 조건이 성립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결전의 교의는 살아남은 것이다.

 

5. 나카시바 — 신화임을 알면서 신화를 쓴 자 (밀교와 현교의 공존)

   나카시바 스에즈미(中柴末純)는 이 책의 가장 모순적이고, 그래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공병 출신의 합리주의자였던 그가 『마코토와 마고코로』(誠と真心)에서 천황을 "모든 색을 종합한 청정순백한 왕"으로 신화화한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나카시바는 그것이 신화임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썼다. 왜냐하면 "모두가 믿어주면 가진 나라와 싸우기 쉬워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물론, 오히려 가장 반-군국주의적인 신념이 자리한다. 오바타의 현교는 애초에 믿을만한 것이 아니지만, 이시와라와 같이 군인은 천황의 명령을 받으면 싸워 이겨내야지 결코 정치와 외교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바타에게 밀교와 현교는 분리되어 있었다. 이시와라에게는 그 경계가 무너져 있었다. 나카시바에게는 두 가지가 의식적으로 공존한다. 그는 밀교를 완전히 은폐하지도, 현교를 신앙하지도 않는다. 대신 현교를 도구적으로 만든다. 천황의 신화화는 군인과 국민을 결전에 동원하기 위한 장치였고, 나카시바는 그 장치를 설계하는 공학자였던 셈이다. 『전진훈』(1941)의 실질적 집필에 그가 관여했다는 점은 이 구도를 잘 보여준다.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문장은 종교적 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포로가 되지 않는 군대를 만들기 위한 공학적 설계였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가 『생산청년훈』에서는 밀교를 토로했다는 점이다. "전력 보유는 결국 물질의 힘과 그 보급이다. 그것이 격파의 유일한 길이다." 이 문장은 『전진훈』의 정확한 반대다. 같은 저자가 한쪽에서는 물질주의적 합리주의를, 다른 쪽에서는 옥쇄의 정신주의를 설파했다. 모순이 아니라 설계였다. 군에게는 옥쇄를, 후방의 청년에게는 증산을, 각자에게 필요한 현교를 분배한 것이다.

   그러나 나카시바의 설계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었다. 옥쇄를 "혼의 돌격"이자 궁극의 전법으로 이론화한 순간, 그는 "옥쇄할 수 있는 군대를 만드는 것 자체가 작전"이라는 도착된 상태에 도달한다. 본래 옥쇄는 자원 부족을 정신력으로 메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나카시바의 이론화를 거치면서 옥쇄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수단으로 설계된 교의가 작동 과정에서 목적으로 전도된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애투 섬 전투(1943)가 그 전도의 첫 번째 결과였다. 약 2,400명이 수비하던 일본군은 전투 말기에 이르러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미국 국립공원관리공단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5월 28일 시점에 지휘관 야마자키 대좌에게 남은 것은 전투 가능 병력 800명과 지난 2주간의 부상자 600명뿐이었다.[4] 그는 항복 대신 돌격을 택했고, 돌격에 참가할 수 없는 중상자들은 사전에 수류탄과 모르핀으로 자결 처리되었다 — 일본군 군의관 타츠구치 파울의 일기는 이 장면을 담담히 기록한다. 이튿날 미군이 확인한 바, 2,400명이 넘는 일본군 수비대 중 살아남은 포로는 단 28명이었다. 미군은 전사 549명, 부상 1,148명에, 혹한으로 인한 후송자가 약 2,100명에 달했다. 나카시바의 설계는 병사를 살려서 다시 싸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병사를 완전히 소모하는 대신 적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히는 방식이었다.

   나카시바의 '옥쇄'는 정말 효과가 있었다. 미국은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드는 일본 군인들에게 두려움을 품었고, 여기까지는 나카시바의 설계가 작동했다. 그러나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고 본토에서 싸우겠다는 일본의 의지를 꺾고 태평양 전쟁을 끝낸 것은, 두 번의 원자폭탄 투하다. 오키나와 전투의 민간인 참극과 본토결전 예상 사상자 추산이 원자폭탄 투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 있다. '갖지 못한 나라'가 '가진 나라'와 싸우기 위해 짜낸 교의가, 끝내는 그 상대방의 극단적 선택을 앞당겼을 수 있다는 것이다.[5]

 

6. 미완의 아이러니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태평양 전쟁'은 결코 이길 수 없었으나 피하지도 못했을 전쟁이라 본다. 사카이까지 모두 일본이 제1차 대전과 같은 근대적인 총력전을 피하지 못할 것이란 걸 알았지만, 역설적으로 유럽과 미국은 '파시즘'에 다가가는 전체주의적 통치로 총력전을 수행했지만, 일본은 총력전을 수행할 수 있는 강력한 통치 조차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 개전 훨씬 전인 '지나사변' 당시에는 일본 국가가 통제할 겨를 없이 시작되어버렸고, 1년 반이 넘어서야 그 의미를 비로소 부여할 수 있게 되고, 내각이 제대로 대응 조차 할 수 없었다. 도조 히데키는 집권 후 총리·육군대신·내무대신을 겸했음에도 실질적 독재가 불가능했다. 해군은 독립적이었고, 의회는 존속했으며, 중신 그룹의 영향력도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한 저자의 답은 메이지 헌법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이노우에 고와시의 시라스(知らす) 설계는 '강한 자가 나오지 않는 구조'였다. 천황이 권력의 정점에 있되 자신의 책임으로 권력을 운용하지 않고, 천황을 대신해 독재하는 자도 나올 수 없는 체제다. 실제로 메이지 시대에는 원로 정치라는 초법적 비공식 권력이 공백을 메웠고, 원로가 사라진 뒤에는 그 빈자리만 남은 것이다.

   즉, 파시즘을 막은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기득권의 자기보존 본능이었다. 자신의 권한을 지키려는 각 세력의 관성이 메이지 헌법을 명분으로 파시즘의 완성을 막은 것이다.

   그리고 파시즘이 완성되었더라도, '갖지 못한 나라'라는 물질적 조건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도조가 히틀러처럼 완전한 독재자가 되었다고 해도, 일본의 생산력이 미국의 생산력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파시즘의 완성이 패전을 피하게 해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다. 미완의 파시즘이 패전을 만든 게 아니라, 갖지 못한 나라가 패전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파시즘조차 완성되지 못한 채 끝난 것이 '미완'의 의미일 것이다. '덜 파시즘적이어서 다행이었다'가 아니라, '파시즘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나라의 운명'에 가깝다.

 

7. '영광의 메이지'의 현재성?

   1차대전 후 일본에서 어떻게 광기서린 파시즘이 자리잡았나 논의를 알고 싶어 열어본 책이지만, 오히려 이 책은 그 광기서린 전쟁광들이 지극히 합리적인 사람들이었음을 시사한다. 오바타는 총력전에서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 이시와라는 일본이 당장은 전쟁에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카시바는 천황이 모든 색을 종합한 청정한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들이 만든 '천황폐하 만세'의 교의는 무지의 산물이 아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갖지 못한 나라'의 조건과 협상하면서 짜낸 응답이었다. 광기의 기원에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물질적 열위를 인식했기 때문에 정신력에 호소했고, 그 호소를 체계화했기 때문에 교의가 되었고, 교의가 되었기 때문에 수단은 목적으로 전도되었다. 처음의 합리성은 이 전개 과정 어디에서도 파괴되지 않는다. 단지 각 단계에서 조금씩 자리를 옮길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그 지극히 논리적인 합리성이 오히려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갖지 못함"을 정신력으로 메우려는 논리는 1930년대 일본 육군을 봐야지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조직이든 구조적 결핍 앞에서 이데올로기를 소환하는 순간 같은 병리가 시작된다. 자원이 없으면 열의로, 시간이 없으면 헌신으로, 시스템이 없으면 개인의 희생으로 메우는 선택은 사실 너무나 합리적이다. 불합리해지는 것은 그 선택이 교의가 되어, 원래의 조건을 잊고, 교의 그 자체가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게 되었을 때다.

   저자는 현대 일본의 '극우'의 뿌리를 '미완의 파시즘'의 정신주의로 본다. 시바 료타로 류의 '영광의 메이지, 러일 전쟁 이후 쇼와 세대의 무능한 일탈'로 보는 사관이나,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의 무책임은 고대 이래 초역사적인 것'으로 보는 사관과 달리, 가타야마는 메이지 시스템 자체가 최악이었고 후세인 쇼와 세대가 그 빚에 허덕였다는 사관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인 미완의 파시즘이, 전쟁이 끝나고도 일본은 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믿음으로 전해져 현대 일본의 극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근대화에 관심으로 시작해, 이제는 일본의 근대 동아시아사에 관한 인식을 알고 싶어 관련 책들을 찾아 읽고 있는데, 마냥 '동양 유일의 근대 제국'이란 상에서 시작했지만 당대에 열강들 틈에서 그들이 했던 고민을 이해할수록 지금의 동아시아의 긴장 완화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우리에겐 일제 강점기, 일본에겐 패전 이전에 대한 일본은 어떻게 동양 유일의 '열강'에서 패전까지 굴러갔는가에 대하여 보수적인 시각을 들을 수 있다. 고정된 역사적 전제로 아쉬운 부분이야 좀 있을 수 있지만, 현재까지 그 시대 제국의 미래를 고민하던 그들의 관점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역 확대에 관한 새로운 가능성의 모색에 있어서는 추천할만한 책이다.


[1] 옥쇄(玉砕)는 '옥(玉)처럼 부서지다'라는 뜻의 한자어로, 원래 『북제서(北齊書)』의 "대장부는 차라리 옥이 되어 부서질지언정 기와처럼 온전하지 않는다(大丈夫寧可玉砕 不能瓦全)"에서 유래했다. 일본군은 이를 '살아서 항복하느니 전원 죽음으로 싸운다'는 전법으로 번안해 사용했다.

[2] 만주국의 계획경제와 동원 체제가 전후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미친 영향에 관해서는 한석정, 『만주 모던: 60년대 한국 개발체제의 기원』(문학과지성사, 2016) 참고.

[3] 이시와라는 병중이라 1947년 5월 사카다(酒田)에 특설된 출장법정에 증인 자격으로만 출정했다. 법정에서 이시와라는 일본이 '쇄국' 상태였음에도 제국주의를 강요한 페리 제독까지 거슬러 올라가 전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4] "On May 28, he had only 800 men available for combat, plus 600 men who had been wounded over the last two weeks of fighting." — U.S. National Park Service, "Battle of Attu". https://home.nps.gov/articles/000/battle-of-attu.htm

[5] 이 해석은 저자의 논지가 아니라 필자의 해석. 가타야마는 '산업가의 창의와 궁리로 생산력을 발전시켜 미국을 이길 수 있다'는 또 다른 발상도 전시 일본에 있었다는 점을 소개하면서, 결국 일본은 원자폭탄이라는 '발명'에 패배한 것이라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