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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높은 마음

by 양자역학이 좋아 2024. 5. 23.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낮은 몸에 갇혀있대도
평범함에 짓눌린 일상이
사실은 나의 일생이라면
밝은 눈으로 바라볼게
어둠이 더 짙어질수록
인정할 수 없는 모든 게
사실은 세상의 이치라면”

- 9와 숫자들, <높은 마음> 中

 

대학시절 내가 가장 고민을 많이 해온 주제는 이른바 주체와 구조의 문제다.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고, 그래서 그만큼 내게는 이를 논할 때 빼먹어서는 안 될 주제들이 많다. 그래서 이따금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과 관계가 가까워질 때면 어떤 식으로든 나오기 마련이지만, 늘 충분히 설명하지 못해 아쉽다.

그럼에도 제한적인 대화만 나누더라도 신기하리만치 말이 잘 통한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마치 오래된 벗을 우연히 마주친 것과 같은 기쁨을 느낀다. 다른 동료 인간과 사귐에 있어 가장 근본적 층위의 친밀감을 채워주는 것은 나는 세계관과 가치관이라고 생각한다. 물리적 공간을 같은 세계로 인지하고 각자의 태도로 삶을 영위하는 서로를 존중하는 일이야 말로 가장 도야된 형태의 우정이고, 그러한 관계에서 얻었던 만족감이 굉장히 크기 때문이다.

수년 간의 고민의 잠정적인 결론을 거칠게 비유하자면, 주체는 자유전자고 구조는 원자의 배치와 같은 것이고, 사회는 마치 고체와 같은 것이다. 각자 가지고 있는 둘 간의 관계에 대한 생각은 각자의 고체물성론에 대한 견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고체물성론에서 고체의 변화는 주체의 결단이 규정한다. 외부 변수에 의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 변수는 주체에 우연한 계기가 되고 구조와 상호작용 속에서 변화의 방향이 결정되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에 따라 이뤄지는 주체의 결단이란 의미다. 구조의 제약에도 불구 심층에서는 자유롭고 우연한, 타자에게는 마치 미끄러짐과 같은 주체적 결단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돌이켜보면 내가 좋아한 반도체, 정치철학, 경제학은 모두 외부를 향한 이해를 넓히고자 했던 탐구였다. 세상에 대해서는 투여하고 원했던 만큼의 이해를 달성하지는 못한 것 같은데 스스로를 향한 이해는 뜻밖에 깊어져 온 것 같다.

누구 노래를 들어도 9와 숫자들을 제치고 내 주제가 자리를 꿰찰 수 있는 노래는 없다. 가끔 아무렇게나 말하다 스스로의 실언에 아차 싶을 때도 있지만, 담장을 낮추고 대화하다 좋은 벗이 될 수 있는 친구들도 알게 될 때도 있다.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과 담장을 낮추는 것은 다르지만, 정제하며 담장을 낮추어 말하는 일은 아직 버겁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오늘도 높은 마음으로 살겠다는 일상적으로 무거운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