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성의 범주에 ‘계산적 합리성’을 넣지 않는 경우는 드물지만, 통치체제에서 계산적 합리성의 중요성은 내가 들어왔던 많은 비판이론들의 범주에서 과소평가되어 왔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관료제 유토피아』에서 관리 기술에 있어 계산적 합리성의 과잉이 기술혁신을 오히려 저해하는 역설을 소개하는데 그쳤다면, 알랭 쉬피오는 근대 통치성의 발전을 ‘수치’의 발전의 맥락에서 파악한다. 즉, 계산적 합리성이 ‘수에 의한 조화’라는 이념으로, 근대적 통치 수단인 법이 왕의 자의적 권력행사를 대체하는 권력으로 자리잡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인치를 막는 법의 기능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저자의 핵심 주장은, 법에 의한 통치가 숫자에 의한 협치로 대체 되고 있다는 주장은, 법이 효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효용계산에 따라 법의 내용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법적 질서를 통해 숫자의 조화를 구현한다는 이상은 피타고라스 학파부터 시작하여 로마법에서까지 서구인의 이상으로 존재했다.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통계가 국가의 인구와 부를 측정하는데 사용되어 왔고, 이로부터 사회경제적 사실이 계량화되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극단으로 공산주의 체제는 경제적 계산에 바탕을 둔 조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법을 개념화 하였고, 극단적 자유주의는 인위적인 시장제도를 자연화하면서 법도 경쟁하는 상품으로서 간주한다. 즉, 공산주의에서의 법은 주권이 아닌 국가 차원의 효용 계산에 의해 합리화되었고, 극단적 자유주의에서의 법 역시 개개인의 효용 계산에 의해 합리화된다. 본래 정치와 주권이 있어야 할 법의 정당성을 과학으로 대체한다는 생각이다.
극단적 자유주의는 법적 관계에서 국가라는 심급을 없앤다. 법치 체계에는 법을 수호하는 제삼자 보증인이 존재했다. 그러나 수치가 재부상시킨 인치는 법을 규범으로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망에서 그 자리에 알맞게 행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법이 각자에게 의무를 부여해야 할 자리에는 계약이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알랭 쉬피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계산적 합리성은 서구 근대성의 주축이 되는 이념으로 그 자체로 합리화되지 않는다.
2) 효용계산에 의해 법의 내용을 산출하고자 한 극단적 자유주의는 법을 정당화하는 기제로서 국가와 주권의 자리를 없앤다.
3) 계산적 합리성에 의해 등장한 수치는 결국 법의 자리를 계약에게 넘겨주고, 이는 법이 교정해온 불평등한 관계를 방치하는 결과를 낳는다.
07~08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수학적 방법으로 risk를 0에 가깝게 만드는 금융공학적 기법에 대한 비판들은 많았다. 또한 노동의 유연성을 강조하고, 수량적 목표달성을 강조하는 자기계발적 주체를 생산해내는 경영학적 담론들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그렇지만 계산적 합리성의 발전에 대해 서구 근대성 서사의 핵심으로 서술하는 책은 흔치 않은데 정말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근대성에 관심 있는 주변 지인들에게도 항상 이 책을 추천했던 것 같다. 특히나 AI를 필두로 하는 통계에서 나오는 기술들이 점점 우리의 삶을 정의하고 결정하는데 사용되고 지지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 기저에 깔려있는 이념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수치에 의한 협치가 법에 의한 통치를 대체하고 있는 현 시점에 법의 주권을 누가 탐하고 있는지 다시 검토가 필요하다.
1년 전에 이 책을 읽으면서 법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좋은 고민들을 많이 하게 해줬기에 다시 읽고 쓴 리뷰다. 그 땐 정리가 잘 안 됐었는데 얼마전에 이 책 내용을 누가 물어봐서 설명하다가 리뷰를 남겨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튼 근대성이나 계산적 합리성이란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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