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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넷 폴, <미래가 사라져갈 때, 식민말기 한국의 모더니즘적 상상력>: 전망없는 시대에 미래를 꿈꾸기

양자역학이 좋아 2021. 8. 11. 01:20
선물 받은 책은 내 수준에서 이해할 수 없어도 꾸역꾸역 읽게 된다. 다 읽고 무언가 느끼는 기분만큼 좋은 때가 또 없는 것 같다. 특히나 일반인의 리뷰가 없는 신간이면, 읽는 기분이 더욱 설렐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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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돌아오는 광복절은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일본의 패전기념일이다. 광복이전 식민 말기를 항일투사들이 일제의 탄압에 맞서 눈물겹게 싸우고, 일제가 독립운동을 더욱 잔혹하게 탄압하던 시기로 생각하는 걸 잠시 멈추고 함석헌 선생의 말에 귀 기울여보자. 해방은 “우리가 자고 있을 때에 도둑같이” 왔다.
<미래가 사라져갈 때>는 토론토 대학에서 한국문학과 문학사를 연구하는 학자 자넷 폴이 쓴 한국의 근대문학 비평이다. 크게 조선어로 글을 쓸 수 있었던 문화통치기(최명익, 서인식, 이태준, 박태원)와 민족문화를 말살하던 내선일체 통치기(최재서, 김남천) 두 시대 문인들의 소설과 평론을 검토하면서 그들의 시대인식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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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the Future Disappears>라는 제목은 역설적으로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해방을 앞둔 문인들의 시대인식에 관해 다루기 때문에 두고두고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근대화의 주요 성과 중 하나가 미래에 대한 예측가능성에서 오는 자유라는 관점에서, 현재의 결과를 이해한다는 것은 과거의 실천이 현재를 낳는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자신이 그리는 미래를 위해 현재 어떤 실천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자유다. 문학, 특히 서사가 실천이란 관점에서 글은 언제나 미래를 두고 쓴다는 관점에서 이 책은 더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제 말기 문인들에게 글쓰기는 미래의 전망이 담겨있는 서사이기보다는(그러한 서사를 쓴 문인들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전망이 없는 시점에서 “사라져가는 미래에 직면해 일상에 천착했던 시기”다. 미래 조선어로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가 조선문학의 미래를 쓰는 것이 아닌 디테일한 묘사에 탐닉(최명익)하는 것으로 축소됐으니 말이다.
물론 그에 맞서기도 한다. 전(前)혁명가 서인식은 고전에 탐닉하는 데서 오는 노스탤지어를 걷어내고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전화하려 노력했고, 이태준은 역으로 한국의 동양적 전통에서 근대의 보편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가장 주된 정서는 박태원처럼 도시 변두리 지식인의 실천하지 못하는 나약함일 것이다. 박태원은 오히려 젊은 시기의 치기는 끝나고 미래에 관한 전망이 악화되며 맞는 중년으로 들어서는 순간의 무력함을 보여준다.
가장 이 책에서 논쟁적인 부분 중 하나는 내선일체가 강조되던 식민 말기의 문단이다. 조선 근대문학을 이끌기도 했던 평론가 최재서는 대동아공영권의 한 주체로서 다시 태어나는 조선문학을 주창한다. 그의 국민문학론은 천황을 위해 목숨바쳐 헌신할 것을 요구하는 황민화는 단지 보이는 ‘선전’에 대한 기회주의적 선택이 아니라 내면에서 합리화된 논리임을 밝힌다. 전간기 독일에서의 <나의 투쟁>처럼, 위기의 시대에 문화가 대공아공영권의 이상에 복무해야한다는 그의 글에서는 식민지인의 묘한 '황민'되는 미래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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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김남천의 소설을 단순 황민화에 찬동한 것이 아닌 조선문학사를 일본어로 이어주는 소설로 보는 평가와 그 한계를 짚으면서 해방이라는 당혹스러운 끝에 다다른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이 책에서 검토한 글들을 쓴 문인들의 아이러니한 말로에서 느껴지는 아이러니는 전혀 새롭지 않았지만, 그들이 이전에 쓴 글에 이어서 보면 느끼는 바가 컸다. 해방이란 게 얼마나 당황스러웠으면 문인들 조차도 해방 조국에서는 “미래가 사라져가던” 과거의 시대인식과 다른 선택을 빠르게 내렸어야만 했다.
해외 태생의 해외대 교수인 저자가 이 책을 통해 한국 태생의 한국인인 내게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은 젊음과 저항이 끝났을 때 무엇을 할 것이냐는 것인 것 같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들은 1935년 카프 해산 이후의 작품이고, 카프만큼 식민 말기 이전에 미래를 치열하게 다룬 문학운동은 없었다. 이곳 저곳에서 나오는 카프의 리더 임화는 마치 대학 시절 친구가 옆에서 이전의 내 생각들을 이야기하면서 계속 묻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전망은 무엇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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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최근 흥미롭게 읽었던 근래의 한국소설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이 책에서 나온 “사라져가는 미래에 직면해 일상에 천착했던 시기” 보다 나은 표현은 아직 못 찾은 것 같다. 우리가 꿈꿨던 미래를 저버리고 나선 목적없이 하루하루 치열한 일상 속으로 돌아간 것 같은데, 다시금 미래를 꿈꾸고 싶어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