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진 (2017). 지리멸렬한 기술유토피아. 창작과비평, 45(3), 284-299.
‘4차 산업혁명’이란 키워드는 굉장했다. 각 정부 부처에서 대처 방안을 짜고, 지난 대선 주자들도 그에 대해 입에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는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반면, 다른 누구는 이것이 굉장히 우리 삶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둘 다 일견의 진실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3차 산업혁명’이라 불렸던 ICT 혁명이 우리의 사회경제적 삶에 그다지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기술 변화가 낼 성과의 규모를 섣불리 확언하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닐 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기술변화에 대한 기대와 회의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에 관한 문제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서동진은 다른 대안이 모두 사라진 시기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담론이 무엇의 표현인지 묻는다. 그는 그것이 기술유토피아 서사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사회유토피아로 나아가는 ‘삶이 획기적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가족드라마’를 포함하지 않고 있어 자기패배적인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의 담론으로부터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기존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삶을 유지할 것이냐는 물음을 받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서사는 우리가 더 자유로워지는 상상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분명히 올 것이고, 그것에 대비하지 않는다면 자동화와 더불어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러니 대비하라는 명령만이 우리에게 닿는다. 나는 4차 산업혁명이 우리 사회에 가져다 줄 사회경제적으로 긍정적인 성과들에 대해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우리가 왜 4차 산업혁명으로 가는 길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하는지에 관해 유토피아를 그려주는 사람을 많이 못 본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출범 연설에서 4차 산업혁명을 대응해야하는 것으로 바라보지, 어떤 방향으로 주도해야할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물론, 이는 현 정권이 무능하다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산업혁명으로 이름 붙인 미래의 이벤트에 대해 어느 누구도 사실은 전망을 보지 못하는 형편이란 뜻이다.
서동진은 한 세기 전의 공상과학소설을 꺼내어 노동시간 단축 빼고 모든 게 이미 다 완성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가 한탄하는 것만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노동시간의 단축을 소망하고 있다. 해결책이 없다면 불가능한 기대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자유로워지길 소망하지 않고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야 말로 디스토피아의 시작이다.
어쩌면 우리는 4차 산업혁명 같은 건 없다는 말보다, 우리의 소망을 이를 통해 실현하는 것을 꿈꿔봐야할지 모른다. 기술유토피아란 것을 그냥 이데올로기라고 넘기기보단, 우리가 원하는 것 중 일부를 이데올로기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