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영, 『반도체를 사랑한 남자』: 기술과 노동 유연화에 대한 다른 상상
- 저자
- 박준영
- 출판
- 북루덴스
- 출판일
- 2023.09.05

『반도체를 사랑한 남자』는 내가 잠시 몸담았던 산업군의 옛날 이야기고 현재의 이야기 때문에 중간중간 킥킥대면서, 때로는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쓰럽다는 생각도 하면서 읽었다.
저자는 반도체연구소 엔지니어로 일하다 인사로 옮긴 후 퇴사하고 인류학을 공부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인사에서 함께 일했던 ‘천 부장’의 삼성에서의 성장담을 다룬다.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천 부장의 커리어다. 전문대졸로 입사하여 생산라인 근무자에서 시작해서 6시그마의 선도자이자 자산관리 시스템 개혁까지 이끌었다. 책이 나온 시점에는 본인이 하고 싶어했던 협력사 컨설팅 업무를 하게 되었다.
인상적인 부분들이 좀 더 있긴 하지만, 기술과 노동유연화에 대한 다른 상상을 가능케 해준 책이다.
기술에 대한 다른 상상
기술이란 게 뭘까? 그것은 어떻게 ‘혁신’할 수 있을까? 경제학에서는 투입산출의 비로 계산하고 또 과학철학에서도 나름대로 여러 이론을 펼친다. 어떤 분들은 ‘특허’라는 게 기술을 표상한다고도 하는데, 특허 출원과 등록이 균일하게 어떤 기준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큰 의미가 없다. 이제는 생태계의 중요성이 널리 알려져서, 천재 몇 명이 산업과 국가를 구원하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나 귀 기울일만한 서사는 더 이상 작동을 하지 않지만, 생태계 투자 담론 역시 그것이 자본을 투입하면 ‘블랙박스’ 안에서 무언가 일어나는 일이라고만 생각할 뿐이다.
적어도 제조업에서 ‘기술’ 경쟁력이란 말을 쓰려면, 대량생산 체제를 이해해야 한다.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도한대로의 성능을 재현 가능하게 구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술자들의 네트워크다. 자본도 물론 중요하지만, 기술자로 투입할 수 있는 유휴노동력이 넘치는 국면을 넘어서면 단지 그렇게만 감각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정리하자면, 기술은 개별 노동자에게 축적되며, 기업은 개별 노동자를 네트워크로 조직하여 기업 수준의 ‘기술’을 보유한다.
기술에 대해 이러한 관점을 취할 때, 기술변화가 빨라질 때일수록 ‘본질’에 집중하라는 의미가 일반미분적분학 교과서를 붙잡으라는 의미가 아닌, 개별 노동자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훈련시키고 생산에 이바지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하여 다른 상상을 가능케 한다.
기업에서 특정 노동자의 특정 기술을 그 특정 노동자가 아니더라도 이용할 수 있는 자산으로 만드는 것은 ‘시스템화’다. 이 시스템화를 통해 특정 기술을 완전히 흡수하기는 어려움은 물론이고, 완전히 기업이 흡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특정 노동자가 그 과정에서 쌓은 다른 암묵지들은 여전히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 도움을 준다. 소위 ‘문제해결 역량’이라던지, ‘의사소통 및 협업 역량’이라고 하는 ‘역량’이 바로 이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역량들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가? 노동유연화를 둘러싼 논쟁들을 살펴보자면, ‘생산성’ 담론이 그저 근면성 강제의 차원에서만 곧잘 논의된다. 회사가 정말로 어려우면 구조조정이 필요하거나 해고 사유가 인정되어서 해고를 해야 하는 상황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국 물 좀 먹어본 사람은 쉬운 해고가 생산성 증대에도 어느 정도 도움된다고는 하지만, 그 시절 미국의 테크 회사들은 모든 이공계 인력들에게 꿈의 일터로 언제나 우수한 노동력이 넘쳐났다는 전제는, 인구가 줄어드는 한국에서 이제 적용될 수 없다.
수출주도 경제의 산업역군들의 삶을 생각해보면 좀 더 쉬워진다.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국내회사들은 몇 곳 되지 않는다. 국내 시장에서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게 애초에 어렵다. 그리고 한 회사만 경쟁에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보통 다 같이 어려워진다. 그 국면에서 구조조정에서 해고된 유휴노동력들은 숙련도에 비해 일시적으로 가격이 하락만 하는 것이라면 괜찮을지 몰라도, 산업에서는 퇴장한다. 수십 년 동안 개인, 기업, 사회의 자원이 투하되어 키워온 숙련된 자원이 증발하는 것이다. 단순히 그 산업에서 통하지만은 않을 조직의 의사결정과정 및 문화에 대한 익숙함, 문제해결력, 위기대처능력 등 추상적인 생산성 향상요인들도 함께 증발하는 것이다.
진정한 생산력 발전을 위한 노동유연화의 조건
과거 컴퓨터 도입과 함께 ‘신자유주의 개혁’이라 불리는 경영상 이유로 해고 및 무역시장에서의 경쟁 시대와 같이, 요즈음엔 AI 기술과 함께 유사-자기개발서 작가들이 똑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한다. 언제나 ‘인생에서 한 가지만 하고 살 수는 없다!’고 외치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외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평생 본인이 팔 수 있는 노동상품은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의 선택으로 결정이 되고, 그 이후의 직종전환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는 그 동안 모은 돈으로 자영업을 하는 쪽으로 귀결이 되었다.
AI 기술의 ‘선각자’ 흉내를 내는 유사-자기계발서 작가들의 말을 우리가 신뢰할 수 없는 건, 물리적으로 개인에게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생존을 위한 객관적인 조건으로서 표상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40시간 일하면서도 육아도 하고, ‘AI 시대’로 직종변경을 위한 학습도 하며,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까지 하는 것은 도저히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삼성정보통신 시절부터 반도체를 사랑한, 작업반장이었던 천 부장이 삼성전자를 글로벌 1등기업으로 만드는 과제였던 식스 시그마 전도사로 성장하고 그 이후에 컨설턴트가 되는 역량을 기르는 과정에는, 일하면서 이뤄낸 성장이 있다. 그가 사내에서 식스 시스마 전문가가 된 것은 교육기관에서 학위를 받아서 성취를 이뤄낸 것이 아닌, 삼성에서 그를 식스 시그마 전문인력으로 차출해서 교육시켰다는 것이다. 그의 성장담을 단지 ‘삼성이 좋은 회사니깐 당연한 거 아냐?’라고 반문해서만은 안 된다. 반대로 왜 대다수의 사람들은 직무전환을 위해 진짜 ‘자신의 노동력을 개발’하고 회사와 전체 경제에 이바지할 기회조차 받지 못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사실 필요한 건 회사나 개별 노동자에게 위기가 오기 전에 다음 커리어를 준비할 시간이다. 일이 안 맞으면 좀 하면서 다른 것 준비하든, 아니면 산업에서 필요한 기술이 바뀌면 새로운 기술을 학습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해지지 않는 한, 내수시장이 작은 고부가가치 수출산업 중심의 경제는 금방 무너진다. 그것이 꼭 마일리지와 같은 것으로 적립이 안 되더라도, 좀 더 시장적으로 정기적인 유급휴일을 더 부여해도 경제전체의 생산성은 훨씬 나아질 것이다. 노동시간은 창의성이나 지식노동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전체의 생산성의 문제다.
좀 더 많은 천 부장들이 커리어 기간동안 쌓은 노하우들을 경제에 계속 기여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