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s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불가해한 재앙을 대하는 자세

양자역학이 좋아 2024. 7. 28. 05:28

  근대성은 자기 자신을 준거로 삼는 합리성이다. 근대인은 도덕적 정당화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 근거를 찾으며, 따라서 자신의 행동에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러한 논리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근대과학은 초자연적인 힘에 기대어 세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우연히 일어난 일은 없고 분명 이 계(system) 안에 필연이 존재한다.
  과학이 발견한 변수들과 함수로부터 우리는 계에 관한 새로운 예측모델을 만들고, 그에 기초해서 미래를 대비한다. 그리고 그 대상이 복잡한 시스템일 때 우리는 아주 자주 변수를 놓친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벌어지고, 일어날 일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 근대인의 숙명은 언제나 무너진 인과적 설명의 모래성을 다시 쌓는 일이다.

근대, 재앙, 통치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현대 사회에서 이따금씩 나타는 불가해한 재앙이 얼마나 섬뜩한지 보여주는 스릴러다. 시작은 여느 스릴러와 같다. 사막에서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돈가방을 찾은 르웰린 모스와 그 돈을 쫓는 안톤 쉬거 그리고 르웰린 모스를 보호하기 위해 안톤 쉬거를 추격하는 보완관 에드 톰 벨 간의 추격전을 다룬다. 훌륭한 장르영화가 그렇듯 스릴러가 갖춰야 할 긴장감을 조성하는 기교는 매우 우수하고, 동시에 문제적인 주제의식을 장르적 특색을 통해 더 잘 드러낸다. 서사를 끌고 가는 힘이 도무지 저항할 수 없는 예측불가능성이 주는 공포라는 데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성취는 뛰어나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보통 사람의 상식과는 너무나 다른 그의 대사들은 한마디 한마디 너무나 섬뜩하다..

  먼저 세 인물을 분석하고 그 다음에 이들이 모인 결말을 이해해보자. 이 영화는 캐릭터 소개에 시간을 오래 할애하는 대신 결말에서 한 번에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모스는 지혜로운 근대인이다. 베트남전 참전 경험을 살려 자신을 쫓아오는 쉬거를 따돌리기 위해 갖은 꾀를 부린다. 쉬거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가까스로 따돌리고 벗어나는데 일부분 성공하기도 한다. 또한 죽어가는 자를 그냥 보고 지나갈 수 없는 상식선의 양심이 있기에, 돈가방이 있던 자리에서 죽어가던 사람이 생각나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의 양심이란 것은 비극의 첫 단추가 된다.
  쉬거는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재앙 그 자체다. 그가 지나가는 곳엔 언제나 파괴가 있다. 그의 살인은 이유도 목적도 없다. 과거에는 모든 불행이 예측가능 했을지도 모른다. 살인에 동기가 정말 필요한가? 삶과 죽음의 문제는 단순하다. 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 이유를 묻는 것도 소용없다. 연거푸 이유를 묻는 이에게 그가 베푸는 자비 역시 동전을 던지는 확률 게임이다.
  마지막으로 최종추격자로 나오는 보안관 벨. 그는 상식을 지키려는 근대의 통치제도다. 여느 서부의 노련한 보안관이 그렇듯이, 범죄의 흔적에서 단서들을 찾아나간다. 쉬거의 위험성을 빠르게 파악하고, 모스를 보호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중간 중간 목적 없는 살인에 당혹하지만 끝까지 쫓는다.
  셋의 관계가 의미하는 바는 결말에 다가가서야 명확해진다. 모스는 쉬거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달아나지만, 멕시코 갱단에게 허무하게 당한다. 쉬거도 집요하게 그를 쫓았으나 직접 살해하는데 실패하지만, 그의 아내에게도 동전을 던지게 하고 살해한다. 이유를 묻는 그녀에게 이미 다 끝났지만 모스의 선택이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쉬거에게 정의나 거래의 규칙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존재하였던 어떤 논리로도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모스 부부의 죽음을 매번 한발자국 늦어 막지 못했던 보안관 벨은 그 무력감에 보안관도 관둔다. 벨이 불안함에 사로잡힌 모습이 잡히면서 끝난다.
  현대 문학의 특징은 아무 개연성 없는, 우연적인 사건이 갈등을 절정에 올리거나 대단원으로 서사를 끌고 간다는 것이다. 모스와 쉬거의 숨막히는 추격전이 1시간 40분 내내 서스펜스를 선사하다가, 2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장면도 없이 모스는 사망한다.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결말과 다를 게 없지만 그런 우발적 위험이 지배한다. 재앙적인 존재 쉬거는 역시 문고리에 공기로 그 현장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보안관 벨은 쉬거가 왔음을 알아보고도 용기 있게 문을 열지만, 그는 이미 그 곳에서 벗어났다. 불가해한 대상에는 영영 닿지 못해 좌절하는 것이다.

 

“Call it”

  아주 꺼림직하고 묵직한 여운을 주는 영화다. 보고 며칠 동안이나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어떻게 짚고 넘어가야할지 종잡을 수 없을만큼 마지막에 벨 보안관의 불안한 표정이 맴돌았다. 세계는 예측할 수 없고, 뜻밖의 행운으로 알았던 일은 그 이면에 기다리고 있었던 비극으로 끝난다. 영화가 쉬거를 통해 제시하는 프레임은 단순하다. 기상 모델이 뭐라 하든 날씨는 비가 오든지 말든지 둘 중 하나다. 공기총으로 문고리를 따고 들어온 쉬거는 당신에게 묻는다. “Call it.” 이때 우리는 우산을 가져갈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정말 동전 던져서 비가 올지 말지 판단할 수 있는가? 또는 정확하지 못한 예측에 아무 판단 없이 동전을 던지는 해결책이 더 나을 수 있는가?
  근대적 통치의 기획은 이 딜레마에서 분명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다. 근대적 통치는 폭력을 비롯해 자원을 독점하는 대신, 개인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예측 가능한 세계를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성과로 우리는 더 이상 어린 시절부터 군사훈련을 받지 않아도 되고 산길을 걸어갈 때 범에게 물려 죽거나 산적에게 목숨을 잃을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변화한 생애주기에 맞춰 교육을 받고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가족을 꾸리고 여생을 보내왔다.
  그러한 약속은 아직까지도 지켜지지 못하고 불가해한 재앙이 우리 삶을 부수고 있지만, 그렇다면 무얼 할 것인가? 사회가 복잡해지고 새로운 불가해한 문제가 다가오지만, 계몽주의의 후계자들인 근대인은 다시 무너진 모래성을 쌓아야 한다. 내가 한 번 당했다고 그 이후에 그 재앙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재앙이 다시 우리 삶을 헤칠 수 없도록 탐구하고 막아야 한다. 재앙은 처음 올 때엔 불가해하지만 두 번째 맞닥뜨릴 때엔 적어도 확률적으로라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근대적 의미에서 세계가 진보한다는 것이고, 근대 사회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블링 링>이 떠올랐다. 물론 둘이 다루는 주제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근대성의 기본 전제가 붕괴한 시대를 다룬다. 그렇지만 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무너진 인과는 우리의 지성이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믿지만, <블링 링>에서 무너진 도덕적 정당성은 그 당혹스러움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10년도 더 전에, 아직 힐링 멘토들이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할 때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고성장 사회에서 산 어르신들 말 믿지말라며, 지금의 저성장 사회에서 사는 청년들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부모 세대보다 못 사는 세대가 될 것이라는 예언 했다. 분명 저성장 시대에 살아가서 운석충돌이나 석유 고갈과 함께 천천히 체제가 망하는데 희망을 걸어보자고 했던 것 같은데, 셰일가스 혁명으로 한국 청년만 계속 암울한 것 같다. 물론, 예견된 재앙도 준비하는 건 너무나 어렵지만, 충분히 지켜봤다면 어떻게든 뭐라도 발버둥 쳐봐야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