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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테크노 자본주의의 상상력이 보여주는 “어쩔수가없”는 세계: <어쩔수가없다>의 개연성과 모순

양자역학이 좋아 2026. 2. 6. 19:41

  우선 영화는 너무 재밌었다. <기생충>을 심각한 사회 고발극이 아닌 블랙코미디로 즐겼다면, <어쩔 수가 없다>를 보면서도 씁쓸한 웃음을 터뜨릴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주인공과 거리설정에 있어 주제의식을 드러내기에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은 있으나, 블랙코미디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는 있다.(만수는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임은 분명한데 관객이 떨어져서 보기 어렵게 화면 구도가 잡혀서 공감 안 된다는 평이 많은 것 같다. <헤어질 결심>에서 통념에 도전하는 도발적인 메시지를 던지기 위한 화면구성은 효과적이었는데 어쩔 수가 없다에서는 조금 미진한 부분이 있지 않았나 아쉬움이 좀 있다) 이 영화가 표현하는 세계는 ‘글로벌 테크노 자본주의의 상상력이 빚어낸 어쩔 수가 없는 세계’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기 위해선, 이 영화가 구조적으로 재현 하는 공포의 실체를 먼저 짚어보자.

  우리가 AI의 등장과 급격한 발전에 대해 느끼는 공포의 실체는 무엇일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인간 대 로보틱스의 대결구도다. 표면적으로 AI 그 자체가 인간을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소위 ‘노동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다. <터미네이터> 시리즈나 윌 스미스 주연의 <아이로봇>와 같은 영화는 표면적으로 인공지능이 보조자를 넘어 목적과 의도를 지닌 인격체가 되어 인간을 지배하려 하고, 그에 맞서는 인간의 저항서사를 다룬다. <매트릭스>는 로봇에게 완전히 장악된 미래를 보여준다. 이러한 영화들의 주된 공포는 자본에 의한 인간 노동의 완전대체가 결국 결정권한마저 탈취하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에 있다.
  두 번째 유형은 AI 자체가 아니라 ‘노동시장에서의 탈락’에 대한 공포다. <오징어 게임> 류의 서바이벌이나 실업자가 등장하는 영화 대부분 이를 다루며, 특별한 비유나 상상력이 없어도 그 공포를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한다. 그 중 가장 예리하게 공포의 실체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영화는 <내일을 위한 시간>이다. 태양광 패널 공장에서 일하다 휴직 후 복직하려는 노동자가 자신의 해고를 막기 위해 동료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는 감원이 불가피한 글로벌 시장의 경쟁 압력이 노동시장을 어떻게 잠식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상상력의 역사적 기원은 90년대 선진국에서 진행된 제조업의 생산기지 이전에 있다중국의 경제개방 이후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되어갔고미국과 유럽은 금융과 IT산업을 포함한 지식정보산업을 위주로 산업구조를 재편하면서 생산거점을 동아시아 등 저개발국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자본과 상품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저숙련 노동은 노동력이 저렴한 지역으로 생산기지가 이전되었고, 동시에 고숙련 노동은 기술혁신으로 그 수요를 줄여갔다. 인간 노동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불안한 존재가 된 것이다.
 
  박찬욱의 <어쩔 수가 없다>는 이 두 가지 공포를 동시에 겨냥한다. 주인공 유만수(이병헌 분)는 25년 동안 태양제지에서 근무한 베테랑이다. 고졸 출신이지만 사이버 대학을 졸업하고 관리자가 되어 ‘올해의 펄프인’을 수상할 정도로 제지업계에서 알아주는 인물이다. 식물을 사랑해 전원주택을 구입해 온실을 마련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성실한 직업인으로서 ‘다 이루었다’. 그의 전문분야인 특수지는 사양산업도 아니었고, 단순 생산직도 아닌 관리자 직급의 엔지니어다. 그러나 해외 자본에 의해 회사가 인수되면서, 그는 하루 아침에 정리해고 된다. 노조 없이 상생경영을 해온 탓에 만수와 동료들은 속수무책으로 심리치료나 받는 신세가 된다.
  재취업은 쉽지 않다. 충치가 생겼지만 아내가 치위생사로 일하기 시작한 치과에 가기엔 괜히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고, 모아놓은 돈은 점점 바닥이 보인다. 정성껏 가꾼 집도 팔기 위해 내놓았지만, 휴대폰 가게를 하는 친구 녀석은 그 집을 사자마자 만수의 분신인 온실을 철거하고 골프 연습 공간을 만들거라 한다. 장애가 있어 첼로 말고는 생존할 수 있는 다른 재능이 없는 딸의 재능은 더 비싼 레슨이 요구되는 상황. 만수는 결국 문 제지의 특수지 라인 관리자의 경쟁자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주도면밀 하게 종이로만 경쟁자들의 지원서를 확보하고, 그보다 더 우수한 경력을 가진 인물들을 추려 제거하기로 마음 먹는다. 아버지의 유품인 북한제 권총을 꺼내든 그는,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해가며 결국 문 제지에 입사하여 완전 자동화된 공정에서 홀로 일하게 되며 영화는 막이 올라간다.

  이 영화의 묘미는 모순에 있다. 태양제지에서 이미 ‘다 이룬’ 만수는 식물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어쩔수없이 나무를 베는 제지 산업에 종사해야 했다. ‘다 이룬’ 만수는 애초부터 그러한 모순을 원예에 대한 사랑으로 온실에서 견뎌왔으나, 정리해고로 다 잃을 위기에 처하면서 병적인 형태로 심화된다.
  그런데 정말 어쩔수가없었나?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했는가? 만수의 살인은 공감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수가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조금 떨어져서 봐야한다. 아내의 조언처럼 좋아하던 원예 기술을 살릴 수 있는 다른 직업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나무의사라는 아주 좋은 직업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우월한 생산력은 분업화와 이에 따른 노동-자본의 상호 의존에 기반한다. 직업은 궁극적으로 생활수단에 불과하다. 또한 대규모 공장제 임노동에서 쌓는 전문기술이란, 사실 고용된 상태에서 숙련되면서 쌓은 것이지 조합에 가입한 중세 장인으로서 신분을 취득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업주와 노동자 모두 노동자가 노동에서의 의미를 찾길 바라고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고,  소명의식은 분업 이전의 완전한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수십 년 동안 숙련된, 업계에서 인정받는 굴지의 회사원인 만수로서는 사실 자존심은 이미 다 버렸다. 만수는 이미 파피루스 제지로 이직한 후배의 부하직원 자리 면접도 보고, 문 제지에 취업을 위해 화장실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도 해본다. 전문기술자로서의 자부심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닌 생존 그 자체의 문제인 것이다. 만수의 경쟁자 제거라는 선택은 ‘어쩔수가없’는 극단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자 영화적 장치로 해석되어야 한다.
  만수는 결국 월남전에서 베트콩을 죽이고 살아 돌아온 아버지의 북한제 권총을 꺼낸다. 돼지농장을 경영하던 아버지는 만수가 현재 살고 있는 집 창고에서, 만수가 어린 시절 전염병으로 돼지를 살처분하고 자살했고 결국 가세가 기울어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그 후 만수는 집을 되찾고 그 창고를 철거하고 자신의 온실을 지었기에, 그에게 있어 온실을 부수겠다는 친구에게 집을 파는 것은 자기 서사의 측면에서도 용납할 수 없다. 즉,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살인은 가장의 의무가 되는 것이다.

  만수의 세 살인을 보면서 그의 내면의 갈등이 어떻게 심화되는지 살펴보자. 처음 살해하려 했던 최선출(박희순 분)은 화분을 집어 떨어트리려 하지만, 결국 차마 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화분의 주인에게 걸려 화분 물을 뒤집어 쓰고는 그 화분을 사서 온실로 가져온다. 다른 둘에 비하면 최선출은 거만하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영포티’처럼 부유함을 뽐내며 사는 인간적으로 좋게 보기 힘든 인물이다.
  다음으로 시도한 구범모(이성민 분)을 살해하려 할 때에는 인간성이 남아있었다. 1차 시도에는 구범모와 아내와 행복한 모습을 보고 포기도 하고, 구범모의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고 그를 집에서 불러내기도 한다. 만수도 자신의 아내와 치과의사 간 외도를 의심하고 있었고 ‘종이밥’ 먹으면서 살아왔다는 연대의식이 있었다. 음악 취미도 상당하고 아내에게 카페를 하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경쟁자들은 만수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후에 만수는 자신의 아내와 대화 중 범모가 그의 아내에게 한 말을 차용해 쓰기까지 한다. 결국 범모를 살해한 건 권총이지만, 방아쇠를 당긴 것은 범모의 아내였을 정도로 만수는 누군가를 살해할 정도의 뻔뻔함이 없었다.
  만수는 이어서 구두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고시조(차승원)을 살해한다. 그의 구두 가게에 가서 실업자 동지들은 서로 알아본다면서 자녀 이야기를 꺼내는 등 먼저 다가간다. 구범모에게선 본인이 동질감을 느꼈던 반면, 고시조에게는 연대의식을 이끌어내고 이를 이용한다. 살해방법도 고시조가 이동하는 동선에 차를 세워놓고 권총으로 살해한다. 그는 시조를 집으로 옮겨서 온실에서 묻기 좋게 몸을 묶고 아버지가 땅에 묻었던 돼지처럼 꽁꽁 싸매고 사과 나무 밑에 묻는다. 아들은 우연히 그 모습을 목격하지만, 아내는 이를 애써 숨기며 돼지를 묻은 거라 안심시킨다.
  마지막으로 최선출(박희순 분)의 살해에서 중요한 건 이제 더 이상 총을 사용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문 제지 회장에게 화장실 앞에서 구걸하면서 체면을 구겼기에 비굴하게 그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그의 비위를 맞춰주며 기회를 노린다. 살해방법도 깔끔하지 않다. 술에 수면제를 타 먹이고 묘목처럼 그를 묻어 질식사시킨다. 중간에 아내에게 전화가 와서 만류해도, 오직 생존만이 중요한 문제다. 그가 사랑해서 지키고자 헸던 것들은 모두 파괴되었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에 그렇다면 대안은 존재할까? <설국열차>에서도 보듯, 박찬욱 영화가 재현하는 세계에는 대안이 없다. 애초부터 결론은 포기하거나 순응하거나 둘 중 하나이지, 영화 속 세계에서 대안을 찾아볼 수 없다. 초반부에 태양제지에 노동조합이 없어서 경영진에 한 마디 못해보고 냉대 받는 장면이 나오지만, 있었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근무자들로 붐비던 태양제지 생산라인과 달리, 기계 소리로만 채워진 문 제지 생산라인으로 태블릿 하나를 들고 들어가는 만수의 뒷모습은 개인이나 개별 사업장 단위에서는 글로벌 경쟁 시장에서 ‘어쩔수가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AI에 의한 생산성 향상은 당장 내 옆의 서너 명과 경쟁해서 자리를 지키는 게 아닌, 수백 명 중에 한 명만 살아남는 노동시장에서의 극단적인 서바이벌을 예고한다. 만수 같은 실력자도 경쟁자를 제거해야 할 정도이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 ‘AI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되세요’, ‘일의 본질에 집중하세요’는 물론이고, “일이 당신의 본질이 아닙니다”도 공허한 심리치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만수에게 완전히 이입하지 않았다면, 쓴 웃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로 맺어야 할 것이다. 정말 어쩔 수가 없다?